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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3.1운동 100주년 재주목 받는 애국기업, LG, GS, 교보생명, 유한양행, 동화약품

오늘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일본의 제국주의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민족의 독립운동사에 큰 기여를 하신 분들의 정신을 이어 받은 애국기업인 LG, GS, 교보생명, 유한양행, 동화약품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민족자본가로 통하는 이들은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거나 물질적 재원을 지원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으며 회사를 직접 창립하거나 기틀을 마련한 기업들은 지금도 대한민국 경제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1. LG

LG는 독립운동가 연암(蓮庵) 구인회 창업주가 1931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구인회상점이라는 상호명의 포목상으로 창업했습니다. 구인회 창업주는 포목상을 운영하면서 모은 돈 1만원(현재가치 1억 5천만원 상당)을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에게 충칭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일제로부터 지명 수배를 받고 있던 백산 안희제 선생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준다는 것은 집안이 풍비박산 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 었지만 구인회 회장은 나라를 되찾고 겨례를 살리자는 구국의 청에 힘을 보내야겠다는 큰 결심을 하고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이러한 창업주 정신을 이어 받은 LG는 현재도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을 위한 사회공헌 활동을 꾸준하게 실천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독립운동가 집안 무료 개보수, 매헌 윤봉길 의사기념관 개보수 공사, 독립유적지 보수, 문화유산 보존사업 등 다양한 복지사업을 통해 창업주의 애국정신을 대대손손 이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2. GS

GS 창업주 허창수 회장의 부친인 허준 선생은 만주 독립운동의 자금줄 역할을 한 백산상회를 공동 설립했으며 허창수 회장의 조부인 허만정 선생도 일제 몰래 독립운동을 꾸준히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허준 선생과 백산 안희제  선생 등이 공동 설립한 백산상회는 독립운동 전체 자금의 60% 이상을 지원한 곳으로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포목, 건어물 등을 파는 일반기업으로 위장해 꾸려졌으나 실제로는 독립운동의 연락과 자금 지원을 목적으로 했습니다. 




허준 선생의 아들인 허만정 선생 역시 민족열사의 피를 이어받아 백산상회의 주주로 활동하며 꾸준히 독립자금을 지원 했으며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은 GS그룹은 독립운동가 알리기에 앞장서는 기업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GS칼텍스에서는 독립운동가 윤봉길 선생과 한용운 선생의 서체를 개발해 일제치하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치신 선열들의 발자취를 따르자는 취지에서 친필과 유사하게 제작 되었으며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3. 교보생명

교보생명의 창업주 신용호 회장은 민족자본형성을 통해 독립운동을 도운 대표적인 인물로 유명합니다. 신용호 회장의 부친인 신예범 선생에게 물려 받은 독립운동 DNA는 그는 물론 그의 형들도 독립운동에 몸 바치게 했습니다. 


특히 신용호 회장은 20세가 되던 해 독립운동으로 유명한 이육사 시인을 만났으며 이후 북일공사라는 곡물회사를 설립하여 얻은 수익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기도 했습니다. 이때 의열단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는 이육사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이후 민족문화사를 설립하여 사회에 기여하는 한편 교육을 통해 나라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교육보험을 만들었으며 교육을 통해 인력을 키우겠다는 신념은 오늘날의 교보문고 설립으로 이어져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꾸준하게 실천하고 있습니다. 



4. 유한양행

유한양행의 창업주 유일한 박사는 일제 식민치하에서 병들어 가는 민족을 보며 "건강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민족의 실력 양성과 경제적 자립을 위해 1926년 유한양행을 설립했습니다. 실제 유한양행 해외지사는 전략적으로 주요한 도시에 세워졌고, 이들은 유사시 항일운동의 지하조직의 핵심으로 운영할 방침이었습니다. 




1930년대 들어 일제의 만주침략과 중일전쟁 등으로 국내외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지 유일한 박사는 미국에 체류하면서 수출선 다변화를 위해 유럽 및 중국시장 개척에 노력하는 한편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일제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유일한 박사는 미군 전략정보처(OSS,현 CIA 전신)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약했으며 OSS가 수립한 냅코(NAPKO) 작전계획에 따라 특수공작훈련을 받고 명령을 기다리던 중 일제의 항복으로 작전 실행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해방 후 유일한 박사는 1946년 7월 미국에서 귀국한 뒤 유한양행을 재정비한 후 사장과 회장,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족경제 발전에 이바지 했으며 1969년 타계 시 전 재산을 공익재단인 유한재단에 기부하며 현재까지도 기업의 최대주주가 공익재단이 돼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 영국적으로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유한양행은 제약기업으로 보건 및 국민 건강을 위한 다양한 사회사업을 전개하고 있으며, 국내외 어려운 환자를 위해 필요한 의약품 지원과 유한의학상, 결핵 및 호흡기 학술상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한 보건분야 학술지원을 등 국민 건강을 위해 앞장서고 있습니다. 



5. 동화약품

동화약품은 1897년 창립한 국내 최초의 제약사입니다. 1897년 궁중 선전관 민병호 선생이 국내 최초 양약인 '활명수'를 개발한 이후 그의 아들인 민강 선생과 함께 활명수의 대중화를 위해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을 창업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 동화약품은 활명수를 팔아 번 돈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했으며 1919년 3.1운동 직후 체계화된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 간 비밀연락망인 '서울연통부'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동화약방의 사장이었던 민강 선생은 국내외 연락을 담당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활명수를 판매한 돈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행정책임자였습니다. 민강 사장은 독립운동에 연류돼 두 번의 옥고 끝에 숨을 거두었으나 죽는 순간까지 나라를 위해 희상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화약품의 초대 사장인 민강 선생은 1909년경 비밀경사대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해 한성임시정부 수립 등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나섰으며 5대 사장인 윤창식 선생은 동화약방을 인수 한 후 경제적 자립으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조선산직장려계'를 결성해 충무로 활동하며 빈민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민족운동을 펼쳤습니다.  



삼일절인 오늘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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